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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미술의 중심지가 된 미국에서는 ‘추상표현주의’라는 새로운 미술 동향이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추상표현주의라는 단어는 미국의 미술 비평가 알프레드 바(Alfred Barr)가 칸딘스키의 유동적인 초기 작품에 대해 평할 때 형식적으로는 추상적이나, 내용적으로는 표현주의적이라는 의미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입니다.
알프레드 바와 그가 만든 '입체주의와 추상미술'에 대한 도표
뉴욕 현대 미술관의 초대 관장이기도 한 알프레드 바는 ‘입체주의와 추상미술’에 대한 도표를 제작하여, 근대미술의 흐름을 시각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고자 했는데요. 그가 만든 도표에는 많은 미술 사조들이 등장하지만, 그 흐름은 결국 기하학적 추상과 비(非) 기하학적 추상으로 나뉘는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근대미술의 종착지를 추상주의로 생각했기 때문인데요. 알프레드 바 뿐만 아니라, 이 시기의 미국의 저명한 미술 평론가들은 각자의 의견에는 다소 차이가 있을지라도, 미술이 점차 ‘추상’적으로 변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 초기 미술의 예시 : 호머와 레밍턴의 작품
(좌) Winslow Homer, <Croquet Players>, 1865 | (우) Frederic Remington, <Pretty Mother of the Night>, 1900
그러나 그의 도표에 나와있는 입체주의(Cubism), 다다이즘(Dadaism), 초현실주의(Surrealism) 등은 모두 유럽에서 등장한 미술사조들입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미국 미술은 유럽의 새로운 사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 초까지만 해도 미국 화단에서는 사회주의 사실주의와 지방주의가 지배적인 형식이었는데요. 그렇다면 어떻게 미국에서 추상표현주의가 등장하게 된 것일까요?
전쟁으로부터의 탈출구, 미국
제1, 2 세계대전은 세계적인 사건이었던 만큼 미술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동안 서양 미술의 중심지로 여겨졌던 파리는 전쟁으로 인해 폐허로 변했고, 많은 화가들이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는데요.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몬드리안(Piet Mondrian), 샤갈 (Marc Chagall), 에른스트 (Max Ernst), 이브 탕기(Yves Tangui), 달리(Salvador Dali) 등의 화가들이 대표적이며, 그들은 이후 미국 미술계에 큰 자극과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페기 구겐하임과 화랑, 금세기 미술(Art of This Century)
한편 미국의 미술품 수집가이자 후원자였던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은 ‘금세기 미술(Art of This Century)’이라는 화랑을 경영했는데, 이곳에서 유럽의 작가들과 미국의 젊은 작가 간의 접촉이 이루어졌고, 그 후 미국 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미국 현대미술의 중요한 산실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유럽의 미술가들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발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요?
새로운 추상, 추상이란 무엇인가
유럽에서 이주한 다양한 화가들 중에는 막스 에른스트 (Max Ernst), 이브 탕기(Yves Tangui),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등을 비롯한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많았습니다.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은 이런 초현실주의자들이 사용하던 자동기술법(오토마티즘)이란 기법에서 강한 암시를 받게 되었는데요. 자동기술법이란,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손이 움직이는 대로 그리는 것을 말하는데요. 초현실주의자들은 자동기술법을 사용해 만들어진 자연스러운 선이나 형태 등이 무의식 세계를 투영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동기술법을 사용해 그려진 그림들 : 앙드레 마송과 이브 탕기의 작품
(좌) Andre Masson, <Automatic Drawing>, 1924 | (우) Yves Tanguy, <Storm(Black Landscape)>,1926
추상표현주의의 대표 화가인 잭슨 폴록의 경우, 전면균질적(全面均質的)인 공간 구성, 드리핑 기법(물감을 흩뿌리는 기법)의 개발, 또 그린다는 행위 자체에 중점을 둔 액션적인 제작 태도에서 자동기술법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자동기술법에 영향을 받은 잭슨 폴록의 작품들
(좌) Jackson Pollock, <Eyes in the Heat>, 1946 | (우) <Number 3>, 1948
추상표현주의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추상적이면서도 전통적인 추상과 다른 특징들을 지니게 됩니다. 전통적인 추상과 추상표현주의의 추상은 기하학적 도형이나, 부정형한 점(點)이나 선, 또는 면에 의해 생성되는 형상(形象)을 갖는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추상과 추상표현주의의 비교 : 잭슨 폴록 VS 칸딘스키
(좌) Wassily Kandinsky, <Improvisation 31 (Sea Battle)>, 1913 | (우) Jackson Pollock, <Eyes in the Heat>, 1946
위 작품 중 좌측의 작품은 전통적인 추상화에 해당하는 칸딘스키의 작품이고, 오른쪽의 작품이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작가, 잭슨 폴록의 작품입니다. 두 작품을 비교해보면 칸딘스키의 작품이 폴록의 작품보다 많은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이렇듯 추상표현주의는 자동기술법에 힘입어 이러한 형상성을 초월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형상을 비롯, 형식적인 측면을 지니는 모든 것을 화면에서 없애고자 했으며, 그렇지 못한 추상이란 구상예술의 연장 내지는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액션페인팅과 색면회화 : 추상표현주의의 두 유형
추상표현주의는 크게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잭슨 폴록으로 대표되는 액션 페인팅과 색면회화가 그것인데요. 같은 추상표현주의이지만, 액션페인팅과 색면회화는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집니다.
Jackson Pollock, <Number 8>, 1949
먼저 액션 페인팅이란, 물감을 캔버스 위에 무작위로 흩뿌리거나, 떨어뜨리거나, 혹은 붓는 방식의 기법들을 말합니다. 액션 페인팅이란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 이는 완성된 그림보다는 작품을 완성하기까지의 과정과 행위를 더욱 의미 있게 생각합니다. 액션페인팅은 작가의 동선에 따라 물감이 뿌려진 정도나 밀도, 선의 굵기 등이 결정되므로 이를 통해 심리적, 감정적 상태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작업을 하고 있는 잭슨 폴록
액션페인팅의 창시자이자 대표 화가인 잭슨 폴록은 보다 효과적인 액션페인팅을 구사하기 위해,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그 주위에서 춤을 추며 페인트를 붓거나, 물감을 흩뿌리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는데요. 때문에 폴락의 작품들은 그의 움직임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추상 표현주의의 대표적인 화가 잭슨 폴록의 작품이 전시되자, 비평가 로젠버그(Harold Rosenberg)와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는 그의 작품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았는데요. 로젠버그가 폴록의 작품이 행위로부터 나타난 결과물임을 강조했던 것과 다르게 그린버그는 회화의 평면성과 그 순수성의 획득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린버그의 주장은 색면회화(Colour-Field)라는 또 다른 유형의 추상표현주의를 낳게 됩니다.
색면회화의 대표 작품들 : 바넷 뉴먼과 마크 로스코
(좌) Barnett Newman, <Who’s Afraid of Red, Yellow and Blue II> | (우) Mark Rothko, <Orange and Yellow>
색면회화 작가들은 그린버그의 주장과 같이 무엇보다 회화의 '평면성'을 강조했는데요. 폴록의 작품에서 물감이 여러 겹으로 쌓여있는 모습 역시 입체적인 느낌을 형성한다고 생각했던 색면회화 작가들은 대형 캔버스에 물감을 넓고 고르게 펴 바르는 새로운 그림을 고안해냈습니다. 이렇게 완성된 작품을 가까이에서 관찰하게 되면, 전면이 균일한 색채로 덮여 있기 때문에 작품이 공간 전체로 확장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데요. 이처럼 색면회화는 색상을 거대한 공간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관람자에게 색 그 자체에서 얻는 에너지와 색채가 주는 감동에서 의미를 주고자 합니다.
바넷 뉴먼의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 (사진 출처: https://froot.nl/)
대표적인 화가로는 바넷 뉴먼(Barnett Newman)과 마크 로스코(Mark Rothko) 등이 있는데요. 이들은 캔버스를 거대하게 확대함으로써 순수한 색채의 표면을 부각시키고자 했으며, 그것에서 명상적이고 정신적인 분위기로 감싸인 고요한 작품들을 제작했습니다.
추상표현주의에 영향을 받은 현대의 작가들: 정재철, 류현욱 & 지젤박
이렇게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적인 두 유형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요. 이처럼 추상표현주의는 불분명한 형태의 작품으로 작가의 감정을 표현하고 공유하는 것에 중점을 둔 화려하고 역동적인 기법과, 강렬한 색채를 특징으로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추상표현주의의 사조에 영향을 받아, 작품 활동을 진행하는 현대의 작가들은 누가 있을까요?
대학 시절부터 추상표현주의에 관심이 많았던 정재철 작가는 강한 붓 터치와, 색감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 갈증을 느꼈습니다. 그에 대한 해결방안을 찾다 보니 이른 것이 현재의 표현방식인데요. 물감을 튀기거나, 작가의 감정에 따라 문지르고 스미게 하는 식의 추상표현주의 기법을 작품에 녹여, 작가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구체적인 대상을 정교하게 묘사하는 것보다, 점과 선, 면, 색과 같이 기본적인 요소만으로 구성된 형태가 더 많은 이야기를 전달해 주기도 합니다. 류현욱 작가는 캔버스 위에 물감을 뿌리거나, 긁고, 겹겹이 쌓는 등 작가의 흔적을 남기며, 감정과 생각을 표현합니다. 그 결과 완성된 작품들은 추상적인 작가의 감정과 생각들을 담게 되고, 그것을 바라보는 관람자는 비정형성을 지닌 형태들을 통해 작가의 감정과 생각을 시각적으로 감상할 수 있게 됩니다.

From a Distance 15-44

지젤박

100x100cm (60호)

From a Distanece 17-8

지젤박

80x80cm (40호)

한국의 마크 로스코가 있다면 이러한 작품들을 남기지 않았을까요? 위 그림들은 이상적인 색의 조화를 통해 극도로 단순화된 풍경을 그려내는 지젤박 작가의 작품입니다. 작가는 아크릴 물감을 두텁게 바른 후 긁어내는 기법을 이용해 자연스러우면서도 생생한 질감을 만들어내는데요. 회화의 가장 기초적인 요소 중 하나인 '색깔'들이 저마다 갖는 상징적인 이미지에 집중한 작품으로, 단순한 구성의 작품이지만 노을이 지는 아득한 지평선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짙은 서정성이 느껴집니다.

추상표현주의는 새로운 미술 사조이자, 깊이 있고 의미가 큰 예술가들을 여럿 발굴하였습니다. 추상표현주의 안에서, 그들은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고, 그 자체에서 충분한 가치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현대 미술에서도, 개인의 감정, 경험을 형태에 구애받지 않고 표현해내는 작가들의 과감한 시도를 기대해 봅니다.